인간은 끊임없이 과거의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이다. -사르트르- ### 한 사람의 철학을 담은 책. 실존주의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탐구하는 철학이다. 실존이란 ‘실제로 있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실존주의는 꼭 사람만이 아니라 사물이나 동물도 다루어야 할 것 같지만, 실존주의의 ‘실존’은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서만 쓰는 낱말이다.
실존주의는 인간만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질 실존에 상대되는 말로, 어떤 존재에 관해 ‘그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이다. 후설은 본질에 대해, 사물의 시공적·특수적·우연적인 존재의 밑바탕에 있으면서 사물을 그 사물답게 만드는 초시공적·보편적·필연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만일 못을 박다가 쓰던 망치가 망가지면, 우리는 못을 박을 수 없게 된 망치를 버리고 새 망치를 산다. 우리한테 필요한(중요한) 것은 ‘못을 박을 수 있는 것’ 또는 ‘못을 박음’이라는 망치의 본질(쓰임새)이지 내가 이용하던 ‘그 망치 ’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망치 같은 물건의 경우에는 낱낱 물건들의 ‘ 존재 ’보다 본질 즉 쓰임새가 더 중요하다. 못을 박을 수만 있다면 이 망치 대신 저 망치를 써도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를 생각해 보면, 다른 어느 누구로도 그 자리를 대신 채울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오랫동안 떠나간 사람을 그리워한다. 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훌륭하게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훌륭해질 수도 있고 비천하거나 비열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인간을 포함해서 세상의 모든 존재물이 도무지 존재해야 할 까닭이 없고, 존재할 의지조차 없이 그저 우연히 거기에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가 어쩌다 보니 이 세상에 있긴 하지만, 꼭 있어야 할 까닭이나 의미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신이 있다고 믿으며, 홀로 신과 대면하는 개인의 종교적 실존을 강조하는 기독교적(유신론적) 실존주의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신이 없다고 믿거나 혹은 신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개인의 주체적 실존을 강조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이다. 사르트르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였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쓰임새를 먼저 생각하고(본질) 만들어지는(존재) 물건과 달리, 인간은 정해진 본성이나 운명 없이 먼저 세상에 태어난 다음(실존)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간다(본질)는 뜻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안에는 인간의 본성을 미리 결정하는 신이 없다. 따라서 미리 정해진 인간의 본성,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본질도 없다. 이 말은 곧 인간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라는 실존주의의 제1원칙에 도달한다. 인간은 이렇게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할 줄도 안다. 그런 의식 덕분에 인간은 이끼나 아메바 같은 존재로 머물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자신을 바꿔 가며 살 수 있다. 이를테면, 어떤 학생이 학급 임원이 되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다. 아니면 발레나 스케이트, 피아노, 축구 같은 특별한 예체능 종목을 전공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고, 좋아하는 책을 많이 읽은 다음에 재미있는 책을 직접 써 보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다 바랄 수도 있고 그 가운데 어느 것도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것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모두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만일 지금의 모습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면, 현재의 모습에 책임이 있는 것도 자신이다. 이처럼 모든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책임지는 것, 이것이 실존주의의 첫걸음이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인간이 곧 불안’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불안을 느끼는 것 같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그들이 불안을 감추고 못 본 척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자기기만’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실존의 불안은 겁을 집어먹고 아무 행동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감정이 아니다. 다만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불안일 따름이다. 이를테면, 공격의 책임을 맡은 군대 지휘관은 병사들을 위험한 지역으로 보내기로 결정할 때, 자신의 선택에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정에 병사들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 때문에 결정을 내리 못하는 일은 없다. 오히려 그들이 제대로 결정을 하려면 그런 불안을 거쳐야만 한다. 그들이 불안을 느끼는 것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검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존주의가 강조하는 불안은 우리의 행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아니다. 오히려 행동의 일부분이자 행동의 조건이다. 사르트르는 독일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낼 때 만난 한 예수회 신부를 보기로 들었다.
그 사람은 평생 고통스러운 일과 실패를 많이 겪었다. 그런 일이 자꾸 이어지다 보니 그는 그 시련을 하나의 신호로 보기 시작했다. 즉, 자신이 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는 신호, 오로지 종교와 성직, 신앙의 성공만을 따라야 한다는 신호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결국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겪는 시련 속에서 신의 계시를 보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같은 시련을 목수가 되라는 신호로 볼 수도 있었을 테고, 혁명가가 되라는 신호로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신호의 의미를 해석하고 결정하는 책임은 자기 자신한테 있다.
다만 그는 미래에 환상을 품지 말라고 한다. 환경운동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든지, 환경오염 없는 세상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식의 환상을 좇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노력뿐이라는 태도로 세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중요하게 여겼던 앙가주망, 바로 적극적인 사회 참여다. 인간은 자기 삶 속에 발을 들여놓고 깊이 관여해서 스스로 자기 모습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모습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없다. 결국, 내가 나의 내면을 발견할 때 동시에 발견하는 타인은 사실 나의 실존에 꼭 필요하며 내가 나를 알고 이해하는 데에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래서 타인은 내가 실존하는 조건이다. 인간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선택하지 않음’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존재이지 미리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도덕을 선택하고 스스로 만들어 가며,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가 하나의 도덕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한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그럼에도 다른 사람의 선택을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판단은 옳고 그름(잘잘못)을 따지는 도덕 판단이 아니라 사실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논리 판단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도덕 판단이란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나쁜 짓이다’ 또는 ‘나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반면에 사실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논리 판단의 보기로는 ‘1+1=3은 계산이 틀렸다’ 혹은 ‘서울은 한국의 수도이다’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런 까닭 없이 이 세상에 던져져 있을 뿐이라는 실존적 진실과 자기가 타고난 삶의 자유를 못 본 척하는 사람들, 결정론을 핑계로 대며 자유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실존주의는 진실에 비추어서 엄격하게 판단할 수 있다. 결정론은 세상의 모든 일이 미리 결정되어 있어서 우연이나 자유로운 선택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보는 생각이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한 사르트르는 결정론이 순전히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기기만일 뿐이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사르트르는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미리 결정되어 주어진 가치는 없다고 주장했다. 가치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가치를 선택한 것이 나 자신이라면 그 가치가 뿌리부터 믿음직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또한 그 가치를 바탕으로 내가 어떤 선택을 한다면, 결국 나의 선택도 아무런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고른 것은 아닐까? 사르트르는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끌어 주는 ‘하느님 아버지’를 빼 버린 이상, 인생에는 미리 결정된 어떤 의미도 없으며 우리 인간이 모든 가치를 발명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이며, 그 의미가 바로 삶의 가치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쓰는것이 아니라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신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을 되찾고, 그 무엇도 자기를 구원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혹시라도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증거가 나타난다 해도 그것이 인간을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정해진 의도나 계획 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고 했다. 따라서 인간은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거나 미리 정해진 목표를 이루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삶의 내용을 채워 나간다. 이처럼 그 어떤 것도 미리 인간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며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야 한다. 물론 자유가 항상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물어보고 의지할 사람도 없고, 신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한 것이 바로 내 삶의 내용이 되고 내 삶의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져야 한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 주거나 대신 책임져 주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고민해서 어떤 것을 선택하든, 아무런 노력이나 도전도 하지 않고 포기하든(사르트르는 포기조차 선택이라고 했다), 그 결과로 빚어진 내 삶의 모습은 나 혼자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에는 늘 불안이 함께한다. 선택의 폭은 너무 넓고, 책임은 너무 무겁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이를 실행해서 결과를 보기 전에 미리 그 선택이 옳다거나 틀렸다고 일러 줄 존재는 없다.
만일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유로부터 도망치려 든다면, 우리는 생각할 줄도 모르고 자기를 의식하거나 미래를 걱정할 줄도 모르는 물건 같은 존재로 굴러떨어질 뿐이다. 또한 더 이상 ‘실존’이라는 말을 쓸 자격도 없다. 자유로운 선택 앞에서 느끼는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에서 불안은 인간의 가장 기본이자 진실한 특징, 인간의 거울이자 뿌리와도 같다. 사람이 아닌 물건은 불안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선택의 결과에 영향을 받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무한하게 열려 있는 미래를 만들어 가려고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그들의 자유는 나의 자유를 제한한다. 나의 선택과 행동은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에, 그들의 선택과 행동은 나의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삶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도 책임이 있다.
우리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삶을 살든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가 겪는 여러 가지 문제와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두고 책임을 느끼며 이를 더 나은 것으로 바꿔 나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실존주의는 이런 부정적인 조건들에서 절망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선택과 책임을 그 어느 때보다 강조할 수 있는 바탕으로 삼았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맥 놓고 앉아 절망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삶을 일궈 나가야 한다고, 그 어떤 위대한 존재가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사르트르의 철학을 마음에 새기고 늘 지금의 나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면서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한다. 젊을 때는 사회를 거세게 비판하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그동안 자신이 거둔 것에 만족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의식이 남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비판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사회 논쟁에 몸을 던지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청년’, 결코 지금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미래를 찾아 나아가는 청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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